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메이지 덴노 (문단 편집) ==== 막부 말기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왕정복고의 대호령.jpg|width=100%]]}}}|| || '''<왕정복고의 대호령>''' (王政復古) || 무쓰히토가 즉위하기 이전 일본 열도는 대단히 혼란한 상황이었는데 '''[[쿠로후네 사건]]'''(흑선사건) 이후 반강제로 쇄국정책이 폐지되고, 미국을 포함한 여러 서양 제국주의 국가와의 불평등조약이 체결되었으며, 황금과 은의 해외 유출로 인한 경제적 혼란이 겹쳐 에도 [[막부]]의 권위가 실추되고 서양에 대한 거부감이 커졌다. 이에 서양 세력을 몰아내자는 양이운동이 일어나고 '''[[존황양이]]'''[* 尊皇攘夷. 천황을 높이고 오랑캐를 물리친다.]를 내세운 [[조슈 번]]과 '''공무합체'''[* 조정과 막부로 대표되는 무가의 이원화된 정치구조를 하나로 합체하자.]를 내새운 [[사쓰마 번]] 등이 에도 막부와 대립하면서, '''도막파 운동'''으로 이어졌다. 그러나 '''[[사쓰에이 전쟁]]'''을 겪은 사쓰마 번은 <양이론>이 비현실적임을 인지하고, [[영국]]과 교류하기 시작했으며, '''[[시모노세키 전쟁]]'''에서 참패한 조슈 번 역시 막부의 동의도 받지 않은 채 시모노세키 항을 개항하는 등 서양을 배워야한다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다. 이러한 격변속에 [[1867년]] [[1월 30일]], 무쓰히토가 일본의 제122대 천황으로 즉위했다. 당시 사쓰마 번은 조슈 번과 힘을 합쳐 도쿠가와 막부를 무력으로 제압할 생각(토막[* 討幕. '''도막'''은 반막부를 뜻하는 포괄적인 뜻이고, '''토막'''은 무력으로 막부를 전복시키자는 용어이다.])이었으나 [[토사 번]]의 고토 쇼지로가 [[사카모토 료마]]로부터 <대정봉환론>을 듣고 이를 채용할 것을 토사 번 간부들에게 제안했다. 여기에 사쓰마 번의 [[코마츠 타테와키]]가 동의하여 두 번 사이에 '''삿토맹약'''이 체결되었다. 이후 토사 번은 대정봉환에 대한 의견을 막부 쇼군인 [[도쿠가와 요시노부]]에게 알렸다. 결국 [[1867년]] [[11월 9일]], 에도 막부의 [[쇼군]]인 [[도쿠가와 요시노부]]가 '''[[대정봉환]]'''(大政奉還)[* 사쓰마 번은 막부에서 이를 거절할 것으로 예상하고, 막부를 무력으로 무너뜨리려 했으며, 쇼군 요시노부는 이를 받아들여 토막의 명분을 없애려고 했다.]을 통해 '대정'(大政)을 조정에 반납하고 천황이 이를 칙허함으로써 공식적으로 에도 막부가 막을 내리게 되었다. [[도쿠가와 요시노부]]는 정권을 반납했지만 교토 조정에서는 여전히 대부분의 정무 처리(정사에 관한 모든 전권)를 요시노부에게 위임했고, 그는 의회에 구 막부 세력을 심어놓으며 정권을 장악했다. 이에 불만을 품은 사쓰마 번은 오와리 번, 토사 번, 후쿠이 번, 히로시마 번을 동원해 교토 황궁을 포위하고, 메이지 덴노로 하여금 왕정복고령을 내리게 하면서 신정부의 수립을 선언했다. 1868년 1월 3일, 메이지 덴노는 '''<왕정복고의 대호령>'''[* 주요 내용은 막부, 섭정, 관백을 폐지하고, 천황 휘하에 총재, 의정, 참여의 3직을 설치하는 것이었다.]을 발표했다. 동시에 요시노부에 대해 관직의 박탈과 함께 영지를 반납하라는 선언이 내려졌다. 결국 구 막부 세력은 '''[[보신 전쟁|보신전쟁]]'''을 일으켜 저항했으나 신정부군에게 패배하고, 완전히 사라지게 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